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형주 공방전 (문단 편집) ==== 관우의 패인 ==== * 병력과 보급이 충분하지 못했다. 상관의 군량미 탈취를 하든 안 하든, 수비병력이 없다면 동오는 무조건 기습공격을 할 작정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병력과 군량미가 부족한 상태에서 [[판청구|번성]]에 허도까지 점령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국 번성도 제대로 점령하지 못했고 상용의 유봉, 맹달은 현지 안정화를 이유로 지원을 포기했다.[* 맹달이 상용을 정복한 것이 219년 여름이다. 선주전에 의하면 조조가 한중에서 물러난 이후에 나오고 여름이라 나오니 6월 경에 점령한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상용 역시 최전선이다.] 결국 관우는 물량을 모아 승부하는 위군을 회전에서 격파하기는커녕 오히려 대패하여 번성 포위망을 풀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조조가 특별히 경계하는 바람에 위군 예비병력이 속속히 모여드는 중이었으니 번성과 양양을 점거하지 않고서는 이 병력을 막는 것은 힘들었다. 관우가 부하들에게 친절하고 사대부에게 엄했다는 말이 있는데 막상 여몽이 형주를 먹고나서도 반란가능성 높으니 바로 장악하라는 우번의 말과 엮어보면 형주 호족들이 관우랑 사이가 나빴다고 보기는 좀 모호하다.(유비가 서주를 장악했을 당시 조표 같은 도겸의 구장이 반란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눈물흘리며 나왔다는 사인은 그냥 일 때문에 욕먹은 감이 있고 사실상 사이가 나빴던건 반준과 미방이 전부인데 이 둘은 물자담당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갑자기 생긴 포로 수만 명에 대해선 이들도 할 말이 있다. 지금처럼 먹고 살 식량이 풍족한 시대도 아닌데, 갑자기 밥먹일 사람이 두 배로 뻥 튀겨졌다, 거기다 얘들은 딱히 밥준다고 우리편 될 애들도 아니다. 느닷없이 포로 3만 명을 감시할 인원도 짜내야 하고 위랑 싸우기 전에 오나라에 3군을 준만큼 주변에 공출할 상황도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의 큰 문제가 있는데 강릉 지역, 즉 남군의 중심지는 식량 생산량에 비해 소모량이 더 많아 외부로부터 식량 공급이 필요한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요 식량 공급처가 파구, 즉 장사 일대였다. 문제는 익양대치 이후로 상수 동쪽이 전부 손권에게 넘어갔다는 것. 애초에 식량 생산량도 부족한데 포로가 3만 명이나 생긴 상태에서 원정군 보급까지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 동오의 기습공격. 물론 관우 측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이미 손-유 동맹의 관계가 물 건너간 상황에서 상관의 쌀까지 털어놓고 경계를 게을리 한 것, 여몽이 병을 앓고 있다고 여몽을 대신해서 온 육손 등을 얕본 것이 패착이었다. * 융중대(천하삼분지계)에서 언급된, 익주와 형주의 연계진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이것은 형주 남군이 넘어간 이후에 촉에서 계속 의도, 자귀, 무현등에 잔존한 관우 패잔병에 지원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물리적인 문제로 서로 연계가 안 되었다고 보긴 어려운 부분이고[* 당장 익양대치 때는 관우가 3군을 빼앗기자 유비가 곧바로 직접 지원을 왔었다.], 한중왕 즉위 이후 유비가 한중과 익주의 안정화를 위해 여러 정책을 펴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익주의 정비가 완전치 않아서 그랬다고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익주의 정비를 생각하지 않고 단독으로 조위의 중심부(+잠재적인 오)를 염두에 두고 출전한 것은 전략적인 실수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예방전쟁 설이나 [[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78303|한중 공방전 조공설]]을 따른다면 칠군수몰 등으로 인한 전선 확대와 조조의 위기감은 촉으로서도 꽤 뜻밖의 일일 테니 참작의 여지도 크다. * 한중에서 얻은 승리와 반란을 사주해서 기세를 탄다는 점은 좋았지만 위의 이유 때문에 북형주 점령이 성공할 확률은 낮았다. 촉군이 위군에 특별히 동원병력이 많거나 병력 질이 압도적인 상황이 아니라서 공성은 물론 회전도 이긴다는 장담이 없었고 마침내 공성전과 회전 모두 실패했다. * 관우의 오판. 수몰되어 개판이 된 번성을 점령하는데 실패했다. 서황한테 진것에 대해 위군의 지원군이 계속 도착하여 물량에서 밀렸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서황이 처음 지원 온 시기는 신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지원군 12영이 도착하기 전에 서황을 야전에서 공격해보아도 괜찮았단 것이다. 하지만 관우는 그 시기를 놓쳤고 서황은 지원군이 도착할 무렵에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황의 간단한 페이크에 속아 넘어갔고, 또 총사령관인 관우 본인이 보병과 기병 5000명을 이끌고 서황과 맞서 싸웠으나 패하여 후퇴했고, 후퇴하는 중에 포위망이 붕괴되어 결국 참패로 이어졌다.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서황을 공격했다면, 페이크에 속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병사를 데리고 가서 맞서 싸웠다면, 10중 녹각에 의지해 포위망 안에서 번성 공격에 집중하며 서황군을 상대로는 방어로 일관했다면 등 여러 다른 선택들이 가능했지만 관우가 선택한 길은 대패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이것이 일종의 예방전쟁으로 벌어진 전역이라는 설도 있는데, 그 설을 따른다면 관우는 병력을 빼야 될 시기를 놓쳤다고 봐야 한다(지나친 성공에 고무되든, 상황이 여의치 않았든). 사실 관우 스스로도 멧돼지에게 물리는 흉몽을 꿨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 사서에 수록된 걸로 봐선 실패를 어느정도 자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예처럼 관우 본인도 적은 나이가 아니라서 조급해졌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절월 역시 이를 위해 어느 정도의 자율권을 부여한 것이라는 것. 관우가 봉수대를 쌓고 언제든 돌아갈 준비를 했다는 기록도 있어서 이런 예방전쟁이 확대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중에 집중된 조조의 압력을 풀어 내기 위한 조공의 성격으로 유비가 위군 견제 명령을 내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 결과만 따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수 있으나 당대 전후에도 총사령관으로서 물리적인 우위를 점한 다음에 공격을 나간 사례가 적지 않으므로 이는 관우의 실책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관우가 독단으로 북형주 공격에 나선 것이 아니라 유비의 명에 따른 것이라면 결국 유비의 책임이라고 봐야 하겠다. 물론, 이 역시 한중전의 조공 성격이라면 이런 확전에 대해 완전히 유비의 책임이라고 보긴 어렵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